마부에서 운전사로:
기술이 일자리를 지우고 다시 만드는 방식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일자리 문제를 마부의 시각에서만 바라봤다면
미래는 암울해 보였을 것이다. 말이 끄는 마차가 자동차로 바뀌면 마부의
일은 줄어든다. 그러나 자동차는 자동차 공장, 운전사, 정비소, 주유소,
물류, 렌터카, 자동차 여행, 모텔 등 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거대한
산업과 일자리를 만들었다. AI는 특별히 다를까? 콘텐트
1
산업은 특별히 다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AI와 콘텐트 산업도 같은 시각이 필요하다.
“AI가 편집자를 몇 명 줄일까”, “성우와 번역가는 얼마나 영향을
받을까”라는 질문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한다. “AI
때문에 새로 가능해진 콘텐트는 무엇인가?”, “누가 새롭게 창작자가
되고, 누가 새롭게 시청자가 되며, 누가 새롭게 참여하고, 누가 새로운
광고주가 될 것인가?”
중국 마이크로드라마 현장:
줄어든 편집자,
늘어난 ‘추카스’
2026년 1분기 중국에서 새로 나온 마이크로드라마(숏폼 드라마)의
95% 이상이 AI로 제작됐다는 조사가 나왔다.
2
제작 현장에서는 예전에 5~6명이 필요했던 편집팀이 한
명으로 줄어든 사례가 보고된다. 분명 기존 직무에는 충격이다. 그런데
같은 현장에서 추카스(抽卡师), 영어로 표현하면 일종의 AI 생성
작가(Generation Artist)라는 새로운 직무가 생겼다.
AI에게 반복적으로 영상을 생성시키고 그중 쓸 만한 장면을 뽑아내며
일관성을 맞추는 사람이다.
추카스는 작가와 감독 사이에서 나온 창작 의도를 AI가 실행할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하고, 그 결과를 편집자가 사용할 수 있는 영상 소재로 만들어
넘기는 중간 제작자에 가깝다. 작가가 극본을 작성하면, 감독이 스토리보드와 인물·배경을 설정하고, 추카스는 프롬프트와 참조 이미지로 수많은 영상 후보를 생성해 제시한다. 이를 감독이 검수한 뒤 편집·더빙·믹싱이 이루어진다. 추카스는 감독이 준 스토리보드에서 ‘인물이
화를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간다’ 같은 지시를 인물 외모, 표정, 동작,
카메라 앵글, 렌즈 움직임, 조명, 배경, 장면의 지속시간까지 포함한
AI용 지시로 바꾼다. 결과가 기대와 다르면 프롬프트를 더 잘게 쪼개거나
참조 이미지를 바꾸어 다시 생성한다. 동시에 전 장면에서 배우 얼굴과
의상, 미술 스타일이 흔들리지 않는지도 관리하고, 생성된 수많은 후보 중
편집 가능한 컷을 골라 기초 보정까지 한다.
©
자싱주저우문화(嘉兴九州文化) 공식사이트
중국의 대형 숏드라마 기업 자싱주저우문화(嘉兴九州文化)는 최근 1년 동안
직원 수가 약 3,000명에서 9,000명 이상으로 늘었다고
밝혔다.
3
새로 늘어난 약 6,000명의 일자리가 거의 AI 콘텐트
생산 체인에 집중됐으며, AIGC(AI-Generated Content)
감독, AI 오디오 작가, AI 이미지 생성자, AI 영상 생성자 같은
직무가 등장했다. AI 이미지 생성자는 AI 도구를 활용한 캐릭터
디자인, 장면 구축, 스토리보드 이미지 제작, 생성된 화면의 수정과
스타일 조정이 주요 업무다. AI 영상 생성자는 AI 영상 도구를 이용해
AI 이미지 생성자가 만든 정지 키프레임과 스토리보드 지시를 바탕으로
동영상 클립을 만든다.
이 회사에서는 AI 콘텐트 관련 인력이 전체 직원의 60%까지 늘었다.
생산비 하락이 콘텐트 공급량의 폭발과 새로운 사업을 주도했다. 다만 이런
사례가 AI 도입이 언제나 고용 증가로 이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기존
제작 직무의 축소와 새로운 AI 직무의 확대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시청자가 창작자가 되는 세계:
쇼러너(Showrunner)의 실험
© 쇼러너
플랫폼
미국 페이블 스튜디오(Fable Studio)의
쇼러너(Showrunner)는 AI 시대의 넷플릭스로 불린다. 여기서는
시청자가 직접 새로운 에피소드를 만들고, 기존 세계관을 리믹스하고,
자신의 작품을 퍼블리시할 수 있다. 다른 사용자가 그 세계관을 리믹스해
돈을 쓰면 원 창작자에게 수익이 돌아간다. 2025년 공개 당시 약 1만
명이 알파 테스트에 참여했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작품을 기반으로
콘텐트를 만들 경우 창작자가 약 40%의 수익을 받는 모델도 제시됐다.
지금 쇼러너는 아예 “당신의 쇼를
출시하라(Publish your show)”, “모든 쇼는 플레이할 수
있고 리믹스할 수 있다(Every show is playable and
remixable)”를 내걸고 있다.
유튜브가 등장하면서 시청자 중 일부가 유튜버가 되었고, 그 주변에
MCN, 썸네일 디자이너, 영상 편집자, 채널 매니저가 생겼다.
인스타그램은 인플루언서, 라이브커머스 진행자, 크리에이터 매니저라는
직업군을 키웠다. 쇼러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뷰어(viewer)가 리메이커(remaker)가 되고,
리메이커가 퍼블리셔(publisher)와 IP
Owner로 성장할 수 있다. AI 감독, 캐릭터 디자이너, 세계관
관리자, 리믹스 편집자 같은 역할도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다만 현 단계의 한계도 분명하다. 쇼러너는 아직 애니메이션 중심이고,
장기간 이어지는 복잡한 서사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에는 약점이 있으며,
실제 생성 결과도 장면의 자연스러움과 연기·리듬 면에서 사람이 다시
손봐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쇼러너가 보여주는 것은
시청자가 창작자로 이동하는 새로운 미디어의 초기 형태에 가깝다.
번역가는 사라질까:
조선일보·Orange·SBS의 답
AI가 새로운 고객을 만드는 효과는 이미 한국과 일본에서도 나타났다. 조선일보는 2025년 9월 업스테이지와 함께 모든 기사를 영어로 실시간 번역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하루 약 20건을 번역하던 체계가 AI 도입 후 하루 600건으로 늘었다. 서비스 도입 3개월 뒤 페이지뷰와 방문 독자는 이전보다 500% 이상 증가했고, 4 일본어와 태국어 서비스도 준비하고 있다. 한국어 때문에 조선일보를 읽지 못했던 세계의 비고객을 고객으로 바꾼 사례다.
©
shutterstock
그러면 번역가는 사라질까. 일본의 사례는 흥미로운 답을 준다. 일본
스타트업 오렌지(Orange)는 생성형 AI를 활용해 만화 번역 생산성을
5~7배 높이고, 월 처리량을 5권에서 50권으로 늘렸다. 장기적으로 월
500권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데 2025년 회사가 사업을 확대하면서
발표한 채용 직군에는 전문 번역가와 함께 원본
그림에서 일본어 글자를 지우고 가려졌던 그림을 되살리는
리터처(retoucher), 번역된 대사를 말풍선 크기와 장면의 호흡에
맞춰 얹는 레터러(letterer)가 들어 있었다. AI가 초벌과
반복 작업을 처리하면서 인간은 말맛, 캐릭터의 성격, 문화적 맥락,
품질관리에 집중한다. 번역 비용이 떨어지자 지금까지 경제성이 맞지 않아
해외에 소개되지 못했던 만화까지 번역 대상이 되고, 결과적으로 사람의
일도 새로 생긴 것이다. 향후 언어 확대 과정에서도 번역 품질을 검수하고
문화적 맥락을 다듬는 전문 인력의 역할은 계속 요구될 수 있다. SBS
역시 2026년 9월 현재 허드슨AI와 <펜트하우스>,
<모범택시> 등의 영어·스페인어 AI 자막과 더빙을 추진하고
있다.
5
연출·편집·VFX(Visual Effects)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난다. 어도비 프리미어 프로(Adobe Premiere Pro)는
촬영 영상을 자동으로 전사해 텍스트를 잘라 붙이는 것만으로 러프컷을
만들고, 원하는 장면을 자연어로 검색하며, 촬영 때 부족했던 몇
프레임이나 주변음까지 생성할 수 있게 했다. 편집자는 영상을 일일이 찾고
잘라 붙이는 작업에서, 이제는 이야기의 리듬과 감정선을 판단하고 어떤
장면을 살릴지 결정하는 일로 변화한다. VFX에서는
오토데스크(Autodesk)의 플로우 스튜디오(Flow Studio)가
배우의 영상으로부터 모션캡처, 카메라 트래킹, 캐릭터 리깅과 조명,
합성용 요소를 자동 생성하고, 그 결과를
마야(Maya)·블렌더(Blender)·언리얼(Unreal) 등에서 다시
손볼 수 있는 형태로 내보낸다. 예전에는 많은 시간이 들던 트래킹과
마스킹, 기초 합성 작업을 AI가 맡으면서, 이제 VFX 아티스트는
AI가 만든 결과의 오류를 찾아 고치고, 실제 영상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움직임·빛·질감·스타일을 다듬는 역할에 더 집중하게 된다.
연출도 런웨이(Runway) 같은 도구를 쓰면 배경과 인물을 바꾸고,
조명과 VFX를 달리한 여러 버전의 장면을 빠르게 만들어 비교할 수
있다. 카메라와 소프트웨어를 직접 조작하는 시간 비중은 줄어들지만, 어떤
장면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정의하고 여러 생성 결과 가운데 작품에 맞는
것을 골라 일관된 세계와 감정으로 연결하는 연출 능력의 가치가
중요해진다.
AI가 콘텐트 산업에 던지는 진짜 질문
©
shutterstock
AI가 콘텐트 산업에 주는 가장 큰 기회는 고통을 없애면서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읽기 힘든 재무정보를 시각적
이야기로 바꾸고, 이해하기 어려운 계약을 만화와 영상으로 설명하고, 한
언어로만 존재하던 작품을 수십 개 언어로 전달하고, 제작비 때문에
영상화하지 못했던 개인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드는 것이다. 복잡한 기업
재무뉴스와 데이터를 생성형 AI를 이용해 데이터 영상으로 바꾸고 사람이
이를 검증·조정하는 방식을 제시하는 뉴스비스(NewsVis) 연구도 이미
발표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AI가 만든 이미지와 음악과 영상을 빠르게 알아본다.
그래서 작품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의식과 새로운 미감,
‘사람의 손길이 묻었다’고 느끼게 하는 섬세함이 더 필요해진다. 인간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더 깊은 인본주의, 인간과 기계가 어디까지
함께 만들고 어디에서 인간이 책임질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협업의 윤리를
작품 자체에서 피어 올라와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더구나 지금은 AI의
극초기다. 생성 버튼 한 번으로 완성품이 나오는 경우보다 어색한 부분을
찾아내고, 다시 시키고, 여러 결과를 조합하고, 전체 톤을 맞추는 일이
훨씬 많다. 어떤 때에는 직접 만드는 것보다 더 귀찮을 수도 있다.
따라서 현장에서는 AI가 만든 조각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내는 디렉팅,
종합, 오케스트레이션 능력이 중요해진다. AI의 흔적을 그대로
노출하기보다 그것을 지우고 다듬어 작품의 미감과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꼼꼼함, 그리고 마지막 결과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임지는 더 높은
프로의식이 요구된다.
교육과 인력 양성도 이런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현장 인력에게 필요한
AI 리터러시는 특정 도구의 메뉴와 프롬프트 기법을 외우는 수준을 넘어,
AI에게 맡길 일을 설계하고, 결과를 평가하고, 여러 모델과 도구를
연결하며, 오류와 저작권·윤리 문제를 찾아내고, 최종적으로 인간의
기준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학교와 기업의 교육 역시 실제
작품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 보면서 인간이 어디에서 판단하고
책임져야 하는지를 훈련해야 한다. 앞에서 본 것처럼 AI는
편집·번역·영상 생성 같은 반복 작업에 필요한 인력을 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추카스, AI 감독, 로컬라이제이션 전문가 등 AI 결과를 검수하고
조율하는 새로운 역할을 만들어 내고 있다. 결국 AI 시대의 제작 현장은
더 적은 손으로 더 많은 콘텐트를 만들 수 있게 되지만, 그 많은
콘텐트를 제대로 된 작품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더 높은 감각과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 더 필요해지는 역설을 만들어 낸다. 일부 프로 음악가가
수노(Suno)로 자신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확장한 뒤 그것을 다시 인간이
연주할 악보로 만들고, 인간 가수가 노래하도록 완성해 최종 창작과
저작권을 인간에게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것은 이런 인간-AI
협업이 향할 한 가지 모습일 것이다.
이경전
경희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빅데이터응용학과 주임교수)이자 한국AI서비스학회 초대회장. 경희대 AI&비즈니스모델 연구실(AI-BM.net)을 이끌며 AI 에이전트, 의료·경제 시스템 응용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인공지능학회(AAAI)로부터 네 차례(1995, 1997, 2020, 2024년) 혁신적 인공지능 응용상(IAAI Award)을 수상했다. 최근 저서로 《AI 플러스 이코노미》, 《향수와 AI》, 《AI에이전트와 사회변화》, 《AI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 《비즈니스모델과 AI》 등이 있다.